에스겔 22장 1절부터 16절까지 개역개정 본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겔 22:1~16 (개역개정)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 사람아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 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런즉 그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알리라
3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 가운데서 피를 흘려 벌 받을 날이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자기에게 부정하게 하여
4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으면,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졌으니, 네 날이 가까이 이르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열국의 능욕거리와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5 네가 가까운 자나 먼 자에게서 능욕을 받을 것이니, 네가 더럽고 큰 요란 가운데 있음이라
6 이스라엘 모든 두령은 각기 권세대로 네 가운데 있어 피를 흘렸도다
7 그들이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8 너는 나의 성물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도다
9 네 가운데 피 흘리기를 두고 참소하는 자도 있도다. 그들이 산 위에서 잔치를 벌였으며, 네 가운데서 음탕한 일을 행하였도다
10 네 가운데 그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과 동침하는 자도 있었으며
11 어떤 사람은 그 이웃의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며, 어떤 사람은 자기 며느리를 더럽히며, 어떤 사람은 그 자매, 곧 자기 아버지의 딸을 욕되게 하였으며
12 네 가운데는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고리와 이자를 받아 네 이웃을 학대하고, 네가 나를 잊어버렸느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그런즉 내가 네 부정한 이익을 얻은 것과 네가 네 가운데서 흘린 피를 쳐서 내 손뼉을 쳤나니
14 내가 어찌 네 마음이 견디겠으며,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내가 너를 당할 자가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내가 너를 열국 중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리고 네 더러운 것을 네 가운데서 없어지게 한즉
16 네가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스스로 더럽힘을 인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22장 1–16절 본문 요약·신학적 해석·관련 구절·묵상·기도문
1) 본문 요약
에스겔 22장 1–16절은 예루살렘을 “피 흘린 성읍”으로 규정하고, 그 죄목을 조목조목 열거한 뒤 임박한 심판과 흩으심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기소장입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 성읍을 심판하라고 명하시며 그들의 가증한 일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3–5절은 우상숭배와 피 흘림으로 스스로 부정하게 된 예루살렘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 결과로 열국의 능욕과 만국의 조롱이 임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6–12절은 구체적인 죄목 목록입니다. 지도자들이 권세로 피를 흘리고(6절), 부모를 업신여기며, 나그네와 고아·과부를 학대하고(7절), 성물을 업신여기고 안식일을 더럽히며(8절), 중상모략과 산당 잔치, 음행과 각종 성적 범죄(9–11절), 뇌물과 고리대, 이웃 착취(12절)가 가득함을 밝힙니다. 핵심 결론은 “네가 나를 잊어버렸다”(12절)입니다. 13–14절에서 주님은 그들의 부정한 이익과 유혈에 분노하여 “내 손뼉을 치셨다” 하시며, 심판의 날에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15–16절은 최종 판결로 흩으심과 수치를 선포하지만, 그 목적은 징벌 그 자체가 아니라 “너희가 이방인의 목전에서 자신을 더럽히는 중에,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이라는 인식의 회복입니다.
문학적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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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운데”(7회 이상)라는 반복은 죄의 내재성과 체계성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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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은 예배/가정/사회/경제의 전 영역을 포괄해, 죄가 사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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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의 능욕/만국의 조롱”(4–5절) ↔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16절)의 대조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그분 백성의 거룩과 공의를 통해 드러난다는 성경적 원리를 재확인합니다.
2) 신학적 해석
(1) 거룩과 공의는 하나
예루살렘의 죄는 단지 의식적 부정이 아니라 사회적 불의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성물을 업신여김(8절)과 약자 학대(7절), 안식일 훼손(8절)과 경제적 착취(12절)가 같은 장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은, 예배와 윤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제단 앞의 경건만이 아니라 시장, 가정, 재판정의 정의를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2) 지도자의 책임과 공동체의 공범성
“이스라엘 모든 두령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렸다”(6절). 지도층의 타락은 공동체 구조 속에 폭력과 착취를 제도화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네 가운데”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 지도자를 변명 삼아 공동체가 면죄부를 받지 못함을 밝힙니다. 죄는 구조적이면서도 개인적입니다.
(3) 우상숭배는 ‘하나님 망각’
12절의 결론 “네가 나를 잊어버렸다”는 우상의 본질을 찌릅니다. 우상숭배는 특정 형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중심 기억에서 밀어내는 모든 질서입니다. 하나님 망각은 곧 인간과 이웃의 경계 붕괴로 이어집니다(부모 경멸, 근친상간, 이웃 착취).
(4) 심판의 목적: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에스겔서의 후렴구는 심판조차 계시적 목적—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함—을 위해 허락됩니다(16절). 흩으심은 파괴가 아니라, 더러움을 제거하고(15절)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하려는 정화의 도구입니다.
(5) 안식일과 사회 리듬
안식일 모독(8절)은 달력의 죄입니다. 시간의 거룩을 파괴하면 인간과 토지, 약자를 위한 쉼의 질서가 붕괴합니다. 안식일은 예배의 날이면서, 경제적 탐욕을 제한하는 사회장치였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힌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고리대와 뇌물(12절)로 치닫습니다.
(6) 성 윤리의 붕괴와 공동체 해체
9–11절의 성적 죄목은 레위기 18장의 금령을 정면으로 위반합니다. 성 윤리의 붕괴는 가정과 씨족 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여파는 사회적 폭력성 증가로 이어집니다.
(7) 그리스도론적 지평
예루살렘은 “피 흘린 성읍”이었으나, 복음서는 “피를 흘리심으로”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엡 2:14 참조). 예수는 안식일의 주(막 2:28)로서 안식의 참의미—생명 살림—을 회복하고, 성전을 정결케 하며(마 21:12–13), 십자가에서 우리 부정과 수치를 담당하셨습니다. 심판의 목적이 인식 회복이듯,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누구신지를 최종적으로 드러낸 계시였습니다.
3) 관련 말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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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15–17: 예배와 정의가 결합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예배를 거부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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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6:8: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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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5:21–24: 공의가 물 같이, 정의가 하수 같이 흐르라는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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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9:33–34: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명령(에스겔 22:7의 학대와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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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8–11: 안식일 규례의 창조적·사회적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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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8장: 근친상간 등 성 윤리 금령(9–11절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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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7:23: 뇌물의 폐해(12절과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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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7:1–11: 성전 신앙의 착각을 깨뜨리는 “이곳이 도적의 소굴이 되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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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6:37–38: 무죄한 피 흘림의 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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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23: 율법의 더 중한 바—정의와 긍휼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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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27: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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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6:22–23: 이름의 거룩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22:16과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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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4–16: 그리스도의 피로 원수 된 것을 허무심.
4) 깊이 있는 묵상
(1) 오늘의 “피 흘린 성읍”은 어디인가
물리적 살인만이 아닙니다. 명예를 살해하는 언어, 온라인에서의 마녀사냥, 구조적 불평등과 제도적 폭력이 낳는 보이지 않는 피흘림도 포함됩니다. 나 또한 “네 가운데”에 서 있지는 않은가요? 내가 속한 가정/직장/교회/도시에서 어떤 형태의 폭력에 침묵하거나 이익을 누리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합니다.
(2) 하나님 망각의 징후
하나님을 “잊는다”(12절)는 것은 주일만 잊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변수에서 제외하는 습관입니다. 일정표와 예산표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라질 때, 우상은 이미 우리의 시간을, 돈을, 욕망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내 캘린더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리듬(말씀·안식·나눔·돌봄)을 구체적으로 회복해 봅시다.
(3) 약자 보호의 구체성
고아·과부·나그네(7절)는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 누구인가요? 미등록 이주민, 돌봄 사각지대의 노인과 아동, 플랫폼 노동자, 파산 직전의 채무자일 수 있습니다. ‘동정’에서 멈추지 말고, 제도 개선을 위한 작은 연대(서명, 기부, 봉사, 정책 제안)에 한 걸음 나아가 봅시다.
(4) 안식의 회복 없이 정의는 없다
쉼의 결핍은 탐욕을 정당화합니다. 안식일은 수입을 최대화하려는 충동을 거절하는 신앙 행위였습니다. 내 소비·업무·콘텐츠 사용 습관에서 ‘그치기’(Sabbath stop)의 표지를 세웁시다. 예: 주1회 구매 중단일, 디지털 금식, 가족·이웃 식탁 공동체.
(5) 성적 순결과 공동체의 건강
에스겔이 열거한 성적 죄악은 개인의 은밀한 일로 치부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공동체의 신뢰와 약자 보호를 붕괴시킵니다. 나의 시선과 상상, 클릭과 대화에서 타인을 대상화하는 습관을 회개하고, 관계를 살리는 존중의 언어·경계·상담을 세웁시다.
(6) 경제 윤리의 재정렬
뇌물과 고리대(12절)는 오늘의 회색지대 관행, 정보 비대칭을 이용한 이익, 약자를 상대로 한 미세 수수료 착취로 변주됩니다. “정직의 비용”을 지불할 용의를 구체화합시다. 예: 투명한 견적서, 이해상충 공개, 빚진 이웃을 향한 관대한 채무조정, 정기적 자선과 구조적 변화에 대한 후원.
(7) 공동체적 회개
본문은 개인 경건을 넘어 공동체의 회개를 요구합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창구가 되고 있는가? 예배의 아름다움이 정의의 하수처럼 흐르고 있는가? 정기적으로 교회/팀/가정 단위의 ‘양심 점검표’를 만들고 실행하도록 합의합시다.
(8) 심판을 넘어 계시로
하나님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16절). 심판의 메시지에서 주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죄책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자리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징계 속에서도 이름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성품(거룩·공의·인자)을 묵상하며 소망을 붙듭시다.
1주 적용 플랜(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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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에스겔 22:1–16 정독 + 죄목 목록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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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재정·직무 윤리 점검표 작성(뇌물·회색지대·이자·수수료·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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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약자 돌봄 행동 1건 실천(기부·봉사·연대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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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디지털 금식 3시간(안식 훈련) + 가족/공동체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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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언어 절제 훈련(비방·과장 0, 칭찬·감사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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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성 윤리 경계 재설정(상담 예약/필터/동반자 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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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공예배 전후 “정의의 하수”가 흐르도록 교회 사역/기금 제안서 초안 작성.
5) 기도문
거룩과 공의의 주 하나님,
오늘 에스겔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당 안에서만 거룩을 말하고, 시장과 가정과 거리에서는 세상의 규칙을 따랐습니다. 주여, “네가 나를 잊어버렸다” 하신 그 말씀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의사결정의 자리에서, 시간표와 예산표에서 당신을 밀어낸 죄를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 가운데 쌓인 피의 문화—언어의 돌, 키보드의 창, 구조의 폭력을 보게 하소서. 약자를 향한 냉소와 무관심,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이용하거나 방치한 죄를 용서하소서. 성물을 업신여기고 안식일을 더럽힌 삶, 예배와 일상의 이중성을 회개합니다. 뇌물과 고리, 정보의 우위를 이용한 이익, 편의를 위한 거짓과 왜곡을 버리게 하소서. 우리의 시선과 욕망을 정결케 하시어, 가정과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모든 음란과 착취에서 돌이키게 하소서.
심판의 날에 누가 설 수 있으리이까? 그러나 주님, 당신의 심판은 우리를 멸하려 함이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이신 주를 알게 하려 함”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흩어지는 수치가 아니라, 정결케 되는 은혜로 이끄소서. 성령님, 우리의 깊은 습관과 구조를 뒤흔들어 새 질서를 세우소서. 안식의 리듬을 회복하게 하시고, 공의가 물 같이 흐르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흘리신 피로 “피 흘린 성읍”의 죄를 덮으소서. 우리 가운데 원수 된 담을 허무시고, 평강의 길을 여소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손을 강하게 하소서. 정직의 비용을 기쁨으로 지불하게 하시고, 약자 보호와 정의 실천을 우리의 예배로 받으소서.
오늘 우리는 결단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달력과 예산을 만들겠습니다. 언어를 정결케 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안식의 표지를 세우겠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비추는 등대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돌이킴을 통해 도시의 공기가 바뀌고, 아이들과 노인과 나그네가 안전을 느끼게 하소서.
주여, 우리의 회개를 긍휼로 받으시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그 약속을 오늘 우리 가운데 성취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맺음말
에스겔 22:1–16은 단지 과거 도시의 기소장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도시를 향한 영적 청문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파괴가 아니라 정화이며,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 인식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으로만 머물지 말고, 회개와 재구성의 용기로 응답합시다. 우리의 예배가 정의로, 우리의 시간표가 안식으로, 우리의 경제가 긍휼로 재배열될 때, 하나님은 이방의 목전에서 친히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