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과 덕, 이웃의 유익, 양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 거침이 없는 자, 구원을 받게 하라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해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침이 없는 자가 되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한줄 묵상

내가 가진 모든 자유의 기준을 나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양심에 맞추고, 먹든지 마시든지 삶의 모든 행실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정렬합시다.

본문 요약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다는 복음의 자유를 재차 언급하며, 참된 자유는 자신의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나 불신자의 잔치에 차려진 음식은 만물이 다 주의 것이므로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어도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것이 우상의 제물임을 밝힌다면, 제보한 사람의 약한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하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교회에 거침이 없는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신학적 해석

1. 자유의 기독교적 텔로스와 건축학적 책임 (Oikodomé)

23절과 24절은 기독교 자유론의 대헌장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exestin)는 고린도 교회의 슬로건을 수용하되, 그 자유의 방향성(Telos)을 유익(sympherei)과 덕을 세우는 것(oikodomei)으로 제한합니다. 덕을 세우다(오이코도메이)는 건물을 견고하게 지어 올린다는 뜻의 건축학적 은유입니다. 성도에게 허락된 복음의 자유는 자아를 확장하고 내 권리를 쟁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웃의 영혼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견고하게 건축하기 위해 수여된 사회적, 기독교적 책임입니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신앙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자유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이 됩니다.

2. 우주적 영유권과 기독교적 대자유 (Tou Kyriou hē gē)

25절과 26절은 시편 24편 1절(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을 인용하며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소유권을 선언합니다. 이방 신전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기일지라도 그 물질의 궁극적 출처와 영유권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우상이라는 허상에 물질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고, 시장의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는 신학적 대자유를 누립니다. 우상의 종교적 오염력보다 하나님의 창조적 청결함이 훨씬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3. 타자 중심적 양심관과 연대성의 윤리 (Alloi Syneidēsis)

28절과 29절에서 바울은 양심(syneidēsis)의 기준을 내 주관적 확신에서 타인의 영적 실존으로 이동시킵니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는 제물을 먹어도 내 양심에 가책이 없지만(자유), 곁에 있는 연약한 지체가 그것을 보고 실족할 위험이 있다면 나의 자유의 행사는 남의 양심(알로이 시네이데시스)에 의해 제한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기독교 윤리는 나 혼자만의 청결함을 추구하는 고립된 도덕주의가 아니라, 연약한 지체의 아픔과 구원을 내 실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연대성의 윤리입니다.

4. 독점적 신중심주의와 선교적 목적론 (Doxa Theou)

31절부터 33절은 기독교 실천신학의 궁극적 종착지이자 최고 봉우리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doxa Theou) 하라는 명령은 신자의 전 삶의 영역에서 세속과 성스러움의 이분법을 해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타인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거침이 없는 자(aproskopoi)가 됨으로써 구체화됩니다. 사도의 모든 행동 양식의 최종 목적은 자아실현이 아닌 많은 사람의 구원에 가닿아 있습니다.

관련 말씀 구절

  • 로마서 14장 19절: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로마서 15장 2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고린도후서 10장 8절: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깊이 있는 묵상

1. 내 권리를 포기하여 공동체를 건축하는 진짜 자유의 권능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과 8장에 이어, 고린도 교회의 거대한 화두였던 복음의 자유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끄어내어 기독교 윤리의 완전한 마침표를 찍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 교회의 강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모든 정죄와 미신적인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대자유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지식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함)를 가졌다는 사실에만 도취되어, 그 자유의 사용이 공동체와 이웃에게 어떤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자유의 진짜 목적과 방향성을 건축학적 용어인 덕을 세우다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합니다. 헬라어 오이코도메이는 무너진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견고한 집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찬란한 복음의 자유를 주신 이유는, 내 마음대로 내 정욕을 채우거나 내 권리의 유능함을 과시하라고 주신 방종의 카드가 아닙니다. 도리어 내 곁에 있는 연약한 지체들의 영혼을 보호하고,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고 견고하게 건축하라고 주신 사랑의 도구입니다. 내가 비록 내 지식과 믿음의 분량으로는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있을지라도, 내 행동이 지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찢어발긴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폭력이자 영적 방종일 뿐입니다.

오늘날 2026년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내 유익, 내 권리, 내 몫을 챙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살아갑니다. “내 돈으로 내가 문화생활을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내 논리와 내 말이 100% 맞는데 왜 내가 꺾여야 하느냐”며 자기중심적인 자유의 깃발을 치켜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확히 선언합니다. 참된 기독교의 권능은 내 자유를 마음껏 휘두르는 승리에 있지 않고,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내 정당한 권리마저 기꺼이 십자가 밑에 묻어버리는 자발적인 사랑의 절제와 양보에 있습니다. 내 만족을 구하던 이기적인 시선을 거두어 내 주변의 연약한 지체들을 살피십시오. 내 권리를 유보하고 타인의 유익을 먼저 구할 때, 우리 삶의 자리에는 비로소 무너진 성벽이 재건되듯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회가 웅장하게 지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2. 만물의 주권을 선포하는 대자유와 일상의 거룩함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강한 자들이 가졌던 신학적 자유의 정당성을 구약 시편 24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장엄하게 확인해 줍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당시 고린도 도시의 시장에서 유통되던 고기들은 대부분 이방 신전의 제단에서 귀신에게 먼저 제물로 바쳐진 후 흘러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그 고기를 먹으면 내 영혼이 더러워질까 두려워 떨었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만물의 주권이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 고기가 비록 추악한 귀신의 제단에 잠시 올려졌을지라도, 그 물질의 진짜 주인과 창조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은 가짜이며 아무것도 아니기에, 하나님의 피조물인 고기 자체를 오염시킬 수 없습니다.

이 선언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미신적인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일상의 대자유를 선물합니다. 세상의 악한 문화나 환경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강제로 오염시키거나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세상 속에서 주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고 다스릴 수 있는 천국 백성의 당당한 권세를 가졌습니다. 어떤 날짜나 방향, 세상의 징크스나 환경적 조건에 마음을 졸이며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만물이 주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위대한 창조 신학을 가르친 진짜 이유는, 성도들이 불신자들의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어떻게 지혜롭고 당당하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조율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신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상 위에 차려진 고기가 우상의 제물인지 아닌지 내 결벽증적인 신앙을 증명하려 구태여 묻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쁘게 먹으라고 권면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악마화하여 도망치는 폐쇄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만물의 청결함을 믿고 불신자들의 삶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들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복음의 빛을 비추는 선교적 종교입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며 위축되지 마십시오. 당신이 딛는 일상의 모든 반경과 만물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담대함과 감사함으로 세상 속으로 침투하여 일상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청지기가 되십시오.

3. 내 자유의 경계선을 결정하는 타인의 양심과 연대성

여기 본문의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독교 윤리의 핵심적 반전이 일어납니다. 불신자의 잔치상에서 음식을 기쁘게 먹다가도, 만약 곁에 있던 누군가가(불신자 주인이든, 함께 간 연약한 그리스도인이든)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입니다”라고 명확하게 제보를 해온다면, 바울은 그 순간 식사를 단호히 중단하고 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내 권리와 자유의 경계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연대성의 선언입니다.

내 지식과 믿음의 양심으로는 그 고기를 먹어도 하나님 앞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떳떳합니다(30절). 그러나 그 고기가 제물임을 나에게 알려준 그 사람의 양심은 다릅니다. 그는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며 “예수 믿는 사람도 결국 우상의 제물을 용납하는구나”라며 실족하거나, 가음에 깊은 상처와 영적 혼란을 겪게 됩니다. 바울은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비방을 받아야 하느냐며, 나의 정당한 자유가 타인에게 걸림돌이 되어 그 영혼을 다치게 한다면, 내 자유의 권리를 그 자리에서 스스로 묶어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논증합니다.

이 타자 중심적 양심관은 오늘날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파산해가는 현대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복음의 대안입니다. 세상의 도덕은 내가 법을 어기지 않고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선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덕은 내 양심을 넘어 내 곁에 있는 형제의 양심과 영혼의 상태를 내 자유의 기준으로 삼으라고 요청합니다. 내 말이 아무리 정당하고 내 행동이 아무리 합법적일지라도, 내 거친 언어와 배려 없는 행동 때문에 내 배우자가 눈물 흘리고, 내 자녀들이 상처받으며,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이 시험에 들어 실족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악입니다. 우리는 나 혼자 구원받아 편안하게 사는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로 묶인 거룩한 생명 공동체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연약한 양심을 내 삶의 경계선으로 받아들이고, 내 자유를 기꺼이 양보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 먹든지 마시든지 삶의 모든 세포를 하나님의 영광 앞에 정렬하십시오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성도의 삶의 대원칙이자 최종 선언을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한마디의 말씀은 신앙생활을 주일 아침 교회의 예배당 건물 안에만 가두어두려 했던 우리의 옹졸한 종교성을 완전히 깨뜨려 부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를 화려한 종교 의식이나 거창한 순교의 현장으로만 제한하지 않고, 인간이 매일 생존을 위해 반복하는 가장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행위인 먹고 마시는 일상의 식사 자리로 가져옵니다.

성도에게는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일 아침에 찬양을 부르는 입술로 월요일 아침 직장에서 업무 전화를 받고 부하 직원을 대하는 것, 교회에서 헌금을 드리는 손으로 가정에서 밥을 짓고 청소를 하며 정직하게 물질을 경영하는 그 모든 일상의 세포 하나하나가 오직 주님의 통치와 영광을 드러내야 할 거룩한 예배의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신학적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의 가장 사소한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아름다움과 공의를 세상에 높이는 일인가”를 정직하게 질문하고 내 이기심을 십자가 앞에 복종시키는 실제적인 삶의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을 주님의 거룩한 조명 아래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성도처럼 행동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탐욕과 분노,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내 이익을 챙기고 내 감정을 배출하느라 주님의 영광을 진흙탕에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뼈저리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사소한 반경 속에서 내가 주인이 되려는 교만을 멈추십시오. 먹는 물 한 잔, 내뱉는 말 한마디 속에서도 오직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공의가 찬란하게 배어나오도록 삶의 모든 궤도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 앞에 정렬하는 진짜 예배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5. 세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거침이 없는 자의 선교적 야성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의 구체적인 삶의 행동 양식으로 거침이 없는 자가 되라는 도전과 자신의 선교적 인생의 비밀을 공개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침이 없는 자가 되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여기서 거침이 없다는 단어는 타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돌멩이나 덫(걸림돌)이 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적 배경이든, 헬라인의 이방 문화적 배경이든, 혹은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교회의 초신자들이든 간에, 신자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다는 고백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아첨하거나 진리를 타협했던 비겁한 기회주의자의 타협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단 한 영혼이라도 더 복음의 진리 앞으로 이끌어내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선교적 목적), 내 주관적인 취향과 정당한 권리와 자유의 고집을 기꺼이 포기하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내 삶을 완전히 맞추어주었던 성육신적인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깊은 영적 전율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거대한 걸림돌이 되어버린 비참한 현실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물질 경영, 남을 배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언어, 내 정당함만을 주장하는 옹졸한 싸움들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믿는 예수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며 돌아서게 만드는 비극적인 덫이 되었습니다.

이 부끄러운 허물을 이 시간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자랑의 시선을 나에게서 거두어 내 주변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고정하십시오. 내가 오늘 가정에서 배우자에게 져주고, 직장에서 내 정당한 이익을 양보하며, 교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그 자발적인 패배와 희생의 걸음걸이가, 세상의 걸림돌을 치우고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복음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내 유익을 구하던 삶을 멈추고 많은 사람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내 삶을 거룩한 제물로 내어드리는 진짜 실력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문

우리의 삶의 이유이시며 온 우주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도저히 구원받을 자격 없는 비참한 죄인이었던 저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쏟아 주시고, 주 안에서 모든 정죄로부터 완벽한 대자유를 허락하여 주신 그 장엄한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고린도 교회의 미숙한 자들처럼 내게 허락하신 복음의 자유를 내 육체의 정욕을 채우거나 내 정당함을 과시하는 이기적인 방종의 도구로 삼아, 정작 내 곁의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고 공동체의 성벽을 무너뜨렸던 우리의 영적 교만과 완악함을 이 시간 눈물로 회개하오니 주의 보혈로 정결케 씻어 주시옵소서. 내 이익의 관철이 아닌 오직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주님, 땅과 거기 충만한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의 소유임을 고백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환경, 직장의 자리와 인간관계가 우리를 흔들지 못하는 하늘의 당당함을 주시옵소서. 일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되, 내 자유의 경계선이 언제나 내 곁에 있는 형제의 약한 양심을 향해 고정되게 하옵소서. 내 말이 아무리 정당하고 내 행동이 법적으로 완전히 옳을지라도, 내 배려 없는 언행 때문에 타인의 양심이 멍들고 신앙이 무너진다면 기꺼이 내 자유를 가위로 잘라버리는 자발적인 복종과 연대성의 윤리를 배우게 하옵소서. 내 고집의 망치를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의 평생의 삶의 목적이 오직 이 한 구절의 말씀 앞에 정렬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진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일 아침의 거룩함이 월요일 아침의 일터와 일상의 식탁 자리로 그대로 번역되게 하셔서, 내 사소한 말 한마디, 정직한 물질의 경영, 친절한 행동의 세포 하나하나를 통해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공의만이 온 세상에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옵소서. 내 만족을 구하던 종교인의 껍데기를 파쇄하여 주시옵소서.

간구하옵기는,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 앞에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추악한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자존심을 지키려 싸우지 않게 하시고, 나와 문화와 배경이 다른 이웃들을 향해 그들의 눈높이로 낮아져 모든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 거룩한 선교적 유연성을 부어 주시옵소서. 내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오직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화평의 사도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내 권리를 묶어 주님의 복음을 전진시키는 성도들의 걸음 위에 하늘의 영원한 상급과 평강을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참된 반석이시며 푯대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