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그리스도의 몸, 약한 지체의 요긴함, 하나님의 고르게 하심, 고통과 영광의 공유, 더 큰 은사와 가장 좋은 길
오늘의 개역개정 본문 고린도전서 12장 21절에서 31절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24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
31 너희는 더
짧은 한 줄 묵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약한 지체를 도리어 요긴하게 여기며, 직분과 은사의 다양성 속에서 오직 사랑이라는 가장 좋은 길을 사모하며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본문 요약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을 비유로 들어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은사주의적 우월감을 책망합니다. 눈이 손을, 머리가 발을 쓸 데 없다고 무시할 수 없듯이, 교회 공동체에서 더 약하고 아름답지 못하게 보이는 지체가 실제로는 도리어 요긴하며 하나님은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을 고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몸 가운데 분쟁을 없애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돌보며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게 하려 하심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이며, 하나님은 교회 안에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신유,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방언 등 다양한 직분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모든 이가 동일한 은사를 가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며, 성도들에게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신학적 해석
본문은 신약 기독교 교회론의 정수인 그리스도의 몸 신학의 윤리적 실천과 은사의 종말론적 목적을 다루는 위대한 신학적 결론부입니다. 바울은 눈이 손더러, 머리가 발더러 쓸 데가 없다고 말하는 상황을 설정하여, 당시 고린도 교회 내 영적 지식인들과 화려한 은사자들이 연약한 성도들을 배척하던 영적 독단주의와 기득권주의를 매섭게 비판합니다. 22절의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는 선언은 십자가 복음이 내포한 신학적 가치 반전의 극치입니다. 세상의 구조는 효율성과 가시적인 강함을 숭배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고르게 하심의 은혜 법칙으로 보존됩니다.
이 고르게 하심의 구속사적 목적은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려 하심입니다. 한 지체의 고통과 영광이 온 몸에 유기적으로 공유되는 상태는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이익집단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력을 공유하는 단일한 신비적 영적 실체임을 증명합니다.
28절 이하에서 바울은 은사와 직분의 목록을 나열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세우심을 선포합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로 이어지는 말씀과 말씀 중심의 직분이 우선적으로 배치된 것은 교회의 기초가 진리 위에 서야 함을 뜻합니다. 바울은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획일주의를 배격하고 다양성의 당위성을 확증합니다. 마지막 31절의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명령은 개인의 영적 영웅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즉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영원히 쇠하지 않는 최고의 길을 사모하라는 종말론적 윤리로의 장엄한 전회입니다.
관련 말씀 구절
로마서 12장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4장 11-12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골로새서 3장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깊이 있는 묵상
1. 독단주의의 종식과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 연대성
인간은 힘을 가지면 군림하려 하고, 지식을 소유하면 타인을 무시하려는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힘의 논리는 교회라는 거룩한 지성소 안까지 너무나 쉽게 침투하여 성도 간의 관계를 깨뜨리고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고린도 교회의 비극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방언과 예언, 지식의 말씀 등 성령의 풍성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선물 주신 분의 뜻을 망각한 채 은사를 개인의 영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은사를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지체들을 향해 쓸 데가 없다며 소외시켰고, 자신들만의 영적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찢어놓았습니다. 바울은 이 오만한 영적 독단주의를 향해 인간의 신체 비유를 들어 매서운 신학적 일침을 가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눈과 머리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지식을 자랑하고 눈에 띄는 은사를 행하며 스스로 교회의 핵심이라고 자부하던 강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손과 같은 지체들, 혹은 가장 낮은 곳에서 거친 먼지를 뒤집어쓰며 수고하는 발과 같은 성도들을 향해 쓸 데가 없다며 그들의 존재 가치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뛰어난 시각적 통찰력을 가진 눈이라 할지라도 손이 없으면 원하는 물건을 단 하나도 잡을 수 없으며, 온 몸의 신경을 통제하는 높은 머리라 할지라도 가장 밑바닥에서 온 체중을 지탱해 주는 발이 없으면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 어떤 대단한 사역자나 은사자라 할지라도, 홀로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히 생명적 빚을 지고 있으며, 상호 의존적인 유기적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한 교회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골방에서 기쁨으로 예배하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이름 없는 지체들이 있기 때문이며, 교회의 거룩한 사역이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수많은 손과 발의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은사와 직분이 화려해 보일 때일수록, 내 밑바닥을 받쳐주고 있는 지체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2. 약한 지체의 요긴함과 하나님의 가치 반전 신학
바울의 논증은 단순한 신체적 비유를 넘어, 기독교 복음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역설이자 가치 반전의 신학적 정점으로 나아갑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세상의 가치관은 언제나 강하고, 아름다우며, 생산성이 높고, 가시적인 업적을 내는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며 그것들을 향해 모든 보상과 찬사를 집중시킵니다. 약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은 가차 없이 도태시키는 것이 세상의 효율성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몸인 교회는 전혀 다른 하늘의 법칙과 은혜의 질서로 움직입니다. 우리의 신체를 정직하게 바라보십시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얼굴이나 강인한 팔다리 근육도 중요하지만, 우리 몸에서 가장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심장, 폐, 간, 눈동자 같은 내부 장기들은 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뼈와 피부라는 단단한 방어벽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 약한 장기들 중 단 하나라도 상처를 입거나 기능을 멈추면 온 몸은 즉시 생명을 잃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의 선언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실제로는 공동체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데 도리어 요긴하고 필수적인 지체입니다.
또한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얼굴이나 손처럼 이미 아름답고 온전한 지체는 특별히 꾸미지 않고 그대로 두지만, 부끄럽고 가려야 할 덜 귀하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일수록 비싼 옷을 사서 입히고 정성스럽게 감싸 안아 소중하게 보호합니다. 부족함이 있는 곳에 더 많은 사랑과 재정,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살아있는 몸이 행하는 자연스러운 법칙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셨다는 24절의 말씀은,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에 깊이 물든 현대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거룩한 복음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외로우며, 세상적인 능력이 부족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부족한 지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장 보배롭고 귀중한 신령한 은혜와 가치를 듬뿍 더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함은 얼마나 많은 엘리트들이 모이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공동체가 세상에서 상처받고 소외된 약한 지체들을 얼마나 요긴하게 여기며, 그들의 부족함을 사랑의 옷으로 얼마나 따뜻하게 입혀주고 존중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3. 분쟁의 종식과 상호 돌봄: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생명체
하나님께서 이토록 지체들을 다양하게 배치하시고, 부족한 자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을 고르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의 화평과 완전한 사랑의 소통에 있습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사탄의 가장 강력하고 집요한 전략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안에 시기와 질투, 교만과 비교의식의 틈을 만들어 지체들을 서로 갈라놓고 분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지배하시는 참된 교회는 지체들이 서로를 내 몸처럼 아끼며 같이 돌보는 상호 책임의 생명 공동체입니다. 이 유기적 연합의 생명력은 기쁨과 슬픔의 완벽한 공유를 통해 증명됩니다. 우리의 실제 몸을 보십시오. 길을 걷다가 문지방에 새끼발가락 끝을 강하게 부딪히면, 그 고통은 발가락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온 신경을 타고 내면 깊은 곳까지 통증이 전달되어 온 몸이 구부러지고 입에서는 신음이 터져 나오며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발가락이 아픈데 눈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비웃거나 잠을 자지 않습니다. 온 몸의 지체가 일제히 연동하여 발가락을 감싸 안고 통증을 진정시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생명적 유기체입니다. 공동체 안의 어떤 지체가 외로움과 질병, 혹은 경제적인 위기를 만나 눈물 흘리며 밤을 지새우고 있다면, 온 교회가 그 아픔을 내 살에 박힌 가시처럼 여기며 함께 가슴을 치고 기도하며 실제적인 사랑의 손길을 뻗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또한 다른 지체가 주님의 은혜로 큰 기쁨을 누리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었을 때, 사탄이 주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십자가 앞에 단호히 못 박고, 내 일처럼 진심으로 손뼉 치며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파편화 속에서 교회가 이 유기적인 사랑과 연대의 삶을 세상 가운데 보여줄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손길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는 바울의 장엄한 선언은, 우리가 더 이상 나 혼자 살아가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삶에 깊이 얽혀 있는 운명 공동체임을 확증하는 신성한 선포입니다.
4. 주권적 직분과 다양성의 조화: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신령한 은사들
바울은 성도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정체성을 확립한 후, 하나님께서 교회의 질서와 성장을 위해 친히 세우신 구체적인 직분과 은사의 목록을 열거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여기서 바울이 직분의 순서를 첫째, 둘째, 셋째로 구별하여 나열한 배경에는 깊은 교회론적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가르치며, 복음의 진리를 공동체 가운데 올바르게 정립하는 말씀 중심의 직분들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초가 인간의 신비로운 체험이나 이적 행함에 앞서, 오직 변치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야 함을 신학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뼈대가 바르게 서지 않은 채 초자연적인 은사만을 쫓아다니는 공동체는 사탄의 거짓 계시와 혼란에 쉽게 흔들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의 직분 뒤에 능력을 행하는 것, 병 고치는 신유,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등 다채로운 은사들을 함께 배치합니다. 특히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방언이나 기적 행함과 같은 선상에서 성령의 고귀한 은사로 분류되었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신선한 영적 통찰을 줍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약한 지체들의 손을 잡아주고 돕는 구제 사역이나, 교회의 행정과 질서를 지혜롭게 이끄는 다스림의 사역은,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방언이나 신유의 역사만큼이나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감동하심 없이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신성하고 가치 있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획일적이고 메마른 군대처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온갖 다채로운 은사들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정원처럼 창조하셨습니다. 나와 은사와 직분의 형태가 다를지라도, 주님이 세우신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교회의 하나 됨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5. 획일주의의 배격과 더 큰 은사를 사모하는 최고의 길
바울은 연이은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영적 교만과 은사적 획일주의의 환상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이 질문들의 답은 단호한 부정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온 교인이 사도이고 온 교인이 방언만 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유기적인 몸으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특정한 화려한 은사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만들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좌절을 주고 그것을 가진 자들에게는 교만을 심어주어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가 동일한 은사를 가질 수 없으며,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은사의 분량을 따라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바울은 본문의 마지막 31절에서 은사론의 신학적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장엄한 도전을 던집니다.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바울이 사모하라고 명령한 더 큰 은사는 개인의 영적 영웅주의를 충족시키거나 남들 앞에 과시하는 더 웅장한 기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뒤이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전개될 사랑의 은사입니다. 방언과 예언과 모든 기적은 이 땅의 시간 동안 잠시 쓰임 받다가 사라질 부분적인 도구에 불과하지만,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자 영원히 쇠하지 않는 완성된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가장 좋은 길, 최고의 길은 은사를 사용하는 성도의 삶의 태도이자 인격적 거룩함인 십자가의 사랑의 길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은사와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사랑이라는 최고의 길 위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 모든 수고는 소리 나는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능력을 구하기 전에, 내 곁의 지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사인 아가페 사랑을 사모하며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6. 결론: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최고의 길을 걸으라
고린도전서 12장 21절에서 31절의 말씀은 오늘날 세상의 성공 신화와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깊이 물들어 복음의 유기적 연대성과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 교회와 우리 모두의 영적 무감각을 깨우는 하나님의 거룩한 경종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사모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 은사와 직분을 자랑하며 은밀하게 파당을 짓고, 내 눈과 머리의 높은 기준을 가지고 연약한 지체들을 향해 쓸 데가 없다고 무시하며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열등감에 빠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배치하신 그 주권적 지혜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소중한 지체들입니다. 내 눈에 약하고 아름답지 못해 보이는 지체일수록 하나님께서 더 큰 사랑과 귀중함의 옷으로 감싸 안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이제 내 안에 가득한 이기심과 영적 자랑의 바벨탑을 십자가 앞에 산산조각 내야 합니다. 말로만 거룩을 외치지 말고, 오늘 내 곁에서 신음하는 지체의 고통을 내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여기며 함께 울고, 형제의 기쁨에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며 함께 웃어주는 진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시다. 내게 주신 작은 직분과 은사를 가지고 가정과 일터 속에서 묵묵히 이웃을 섬기며, 오직 사랑이라는 가장 좋은 길, 최고의 길을 따라 하루하루를 걸어감으로써 주님의 교회를 화평 중에 아름답게 세워가는 신실하고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사 주님의 거룩한 몸 된 교회의 고귀한 지체 삼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그 놀라운 구원의 신비와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 온 영혼을 다해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타락한 힘의 논리와 이기주의를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여와, 내가 가진 작은 지식과 직분을 자랑하며 연약한 지체들을 향해 쓸 데가 없다고 무시하고 판단하며 공동체를 찢어놓았던 저희의 완악한 죄악들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늘 선포된 말씀을 통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과 창조의 지혜를 온전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의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셨음을 확신하게 하시고, 다른 이들의 화려함을 부러워하거나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내 사명의 자리를 겸손히 파수하는 신실한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내 눈의 우월감과 교만을 십자가 앞에 온전히 깎아내게 하시고, 교회 안의 다채로운 직분과 은사의 다양성을 깊이 존중하며 한 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영적 통일성을 이루게 하옵소서.
특별히 교회의 약하고 부족하며 아름답지 못해 보이는 지체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가치 반전의 시선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요긴하게 여기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의 손길로 그들의 부족함을 따뜻하게 입혀주고 감싸 안는 거룩한 환대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 가운데 모든 분쟁과 시기의 영을 결박하여 주시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를 내 몸과 같이 돌보는 상호 책임의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한 지체의 고통을 내 살에 박힌 가시처럼 아파하며 함께 눈물 흘려 기도하게 하시고, 한 지체의 영광과 기쁨을 시기 없이 내 일처럼 진심으로 축하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옵소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능력만을 구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공동체의 덕을 세우며 영원히 쇠하지 않는 더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가 머무는 모든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고, 오직 사랑이라는 가장 좋은 길을 걸어감으로써 분열된 세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과 십자가의 복음을 영광스럽게 증거하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